문화 중개인이 되고 싶다
또한 아르헨티나에서 온 앨리오 노라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의직업은 댄서였고 우리 행사에서 공연을 해 주었다. 나는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캐나다, 인도, 콜롬비아, 과테말라, 멕시코, 브라질, 피지, 필리핀, 남아프리카,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콩고, 러시아,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핀란드, 그리스, 아일랜드, 잉글랜드, 리투아니아, 스페인 등 31개국의 춤과 음식과 전통 공예품들을 한자리에서선보일, 실로 거대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몇몇
까다로운 것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특히 캐나다의 엄격한 위생법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행사장 안에서는 각 나라의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미리 당국에 어떤 요리를 할 것인지를 신고를 해야 했다.그러나 몇몇 나라에서 이를 빠뜨렸다.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메뉴에 밥을 안 적어 내서 밥 대신 빵과불고기, 김치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남편 짐은 행사장에서 필요한 여분의 씽크대 6개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만드는 동안 나는 바바라와 마지막 점검을 했다. 나는 15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서 각자 자원 봉사자 한 사람이 책임자가 되어일을 맡도록 했다. 약 300명의 자원 봉사자들은 각 부서 책임자가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날씨였다. 일기 예보에 바짝 신경을 세웠다. 행사 전날 밤은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드디어 멀티 컬추럴 페스티벌의 아침이 밝았다. 신선한 새벽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행사장인 버나비 센트럴공원에 있는 스완가든 스타디움으로 갔다. 행사장에는 일찌감치 나온 자원 봉사자들이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자원 봉사자들은 내가한국에서 주문해 온 노란색 티를 입었다. 멀리서도 금세 알아볼 수있었고 초록색 잔디와도 잘 어울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머지 자원봉사자들이 나타나 주위는 온통 노란 물결을 이루었다. 그들은 각국나라의 텐트로 가서 각자 주어진 임무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짐과 나는 물 한 방울 마실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데도 너무 큰 행사여서 그런지 조바심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축제는 정각 10시에 개최되었다. 캐나다 국가인 <오, 캐나다>를캐네디언이 불렀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한복을 입은 교민 여성이 불렀다. 시간 관계상 두 나라의 국가로 참가국에 대한 의식을 대신했다.
한국의 사물놀이, 중국의 쿵푸에 이어 각 민족들의 민속촘과 놀이, 음악 등이 흥겹게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과 민속 공예품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나는 그 넓은 행사장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행사가 끝나 갈 시간이 되자 눈이 몹시 아프고 쓰렸다. 눈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줄줄 흘러내렸다. TV카메라가 고개 숙이는 나를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캐나다 텔레비전 방송사와 가장 인기 있는 라디오 방송국 2곳, 그리고 일본 TV. 라디오와 중국 라디오 등이 멀티컬추럴 페스티벌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신문은 물론, 이곳에있는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프랑스 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몇 매체들은 아예 나를 포커스 맞추어 기사를 내보냈다. 국제 학생
신분으로 와서 가정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짧지만 굴곡 많은 인생사가 대서 특필되었다. 행사가 끝나자 자원 봉사자들이 끝까지 남아 각 민족들이 쓴 텐트들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이제 그들도다 떠난 텅 빈 행사장에 나는 혼자 남아서 짐을 기다렸다. 식사도거른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와주고 있던 짐이 피곤하고 지친모습으로 내게로 다가오자 왈칵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한동안 부둥켜 안고 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비로소 눈을 붙일수 있었다. 내 딸 케일린이 “마미!”하고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니 다음날 오전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케일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저작권자ⓒ 충남세계타이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